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돌프 헤스 (문단 편집) === 히틀러와의 만남 === [[파일:Portrait_of_Rudolf_Hess.jpg|width=400]] [[파일:루돌프 헤스.png|width=500]] 1920년 호프 브로이하우스에 들렀다가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지역구 군소 정당의 '화가' 출신이라는 한 연사가 내뱉은 연설에 감화된다. 급기야 그가 독일 민족의 구원자라고 여기게 된 헤스는 그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그 연사는 [[아돌프 히틀러]]다. 당시 히틀러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히지 못한 유력 인사 수준이었지만, 헤스는 [[툴레 협회]] 시절의 인맥을 동원해서 히틀러가 당권을 잡는데 기여했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돌격대 안에서 "대학생 100인회"도 결성한다. 1923년 [[뮌헨 폭동]] 후엔 체포돼서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히틀러와 수감되는데 다시 간수들의 배려로 히틀러의 바로 옆방을 쓴다. 이때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서 히틀러의 구술을 바탕으로 [[나의 투쟁]]이 저술된다. 이런 게 가능했던 것은 재판 과정 자체도 코메디였기 때문이다. 좌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폭동과 다른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재판관은 '''아니, 히틀러 선생 같은 애국자가 있었다니''' 하면서 무제한의 변론권을 허용하고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서 듣보잡에서 일약 전국구급 네임밸류 난동꾼으로 출세(?)한다. 히틀러의 형량도 6개월뒤에 석방이 가능한 5년금고[* 헤스는 18개월.]였고 노역도 없고 평상복을 입고 교도소 내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였다. 간수들도 깍듯하게 독립 투사 대하듯 하고 접견도 무제한. 히틀러의 후원자들이 충성심을 보이려고 매일 얼굴 도장 찍으러 드나들었고 감방 안에도 꽃이나 가구가 꾸며질 정도였다. 사실 헤스는 히틀러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절 이후의 별다른 업적이나 공로랄 것은 없다. 히틀러가 그랬듯 헤스 역시 행정이나 사무에 대해선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재능이나 군사적 재능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 시절의 공로로 인해 의전상 서열이 나치당 인사 중 2, 3위였을 뿐이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뮌헨 당사의 '퓌러 대리'로 임명되지만 히틀러와 지리적으로 멀어지면서 권력은 한층 더 멀어졌다. 헤스를 대신하여 급부상한 인재가 본래 헤스의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이었다. 심지어는 히틀러 역시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후계자인 괴링에게 유고가 생길 시 그 권한은 헤스에게 계승될 거라고 선언했었지만, 실제로는 괴링을 따로 불러 괴링이 퓌러만 되면 헤스를 축출해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